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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신 술 병의 수 만큼

  • 레이나(leina)
  • 2016년 3월 25일
  • 6분 분량

Miami, US 2010

우리는 여러 번 장기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적이 있다. 서로의 불만이나 문제를 짐작할 뿐이지, 한 번도 캐물은 적은 없다. 상대에 대한 불만이 지워졌을 때쯤 혹은 그 불만이 해소될 때쯤 용케도 둘 중 누군가가 연락을 한다. 친한 친구들이 그러하듯 우리는 여러 번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삭제했다가 되살리곤 했다. 위안이 필요할 때도 만나는 사이니 좋을 때만 취하는 사이도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서로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는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다.

“드라이브 가자.” 가끔 조우는 명랑하게 ‘안녕’ 하고 인사를 했지만 그것은 정적을 깨기 위한 시도다. 보통은 원하는 것을 직접 이야기한다. 도착했다는 문자가 온 것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서다. 남들처럼 지나는 길에 생각났다는 변명이나, 보고 싶어 오는 길이었다는 들뜸 같은것도 우리 사이에는 없다.

“여기서부터 직진만 해보는 것 어때? 무조건.”

“직진할 수 없을 때는?”

“그때는 좌회전.”

“우회전은 안 하고?”

“좌회전 우회전 마음대로 하면 직진만 하는 의미가 없잖아.”

무엇이든 잘 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울 일이 별로 없다. 먼저 정하는 사람이 늘 승자가 되는 법이니까. 답을 듣는 쪽은 그 답이 본인이 원하는 답이든 아니든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일 확률은 대부분 반반이다. 그것을 못하는 사람은 가야 할 길을 잃고 잘도 휘쓸 린다. 나처럼.

“좋네.”

”응, 좋아.”

“커피도.”

“그래.”

괜찮다는 이야기. 우리식의 대화다. 그간 괜찮았다는 이야기. 내가 지난번 연락도 없이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은것도, 조우가 결혼 준비를 하는 것을 미리 말 하지 않은것도 모두 괜찮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너른 의미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상대를 무한대로 믿어주고 이해해야 한다. 상대가 조언을 구하기 전까지 그 어떤 것들을 캐어 묻는다면 상대는 자신의 마음도 정리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국면에서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결혼해. 나.”

“오예, 막다른 골목이다. 그럼 좌회전!”

나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한다. 나는 조우의 결혼에 대해 축하한다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묻는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택할지 아직 정하지 못 했다. 그래서 커피를 손에 쥐고 전방을 주시하던 나는 막다른 골목이 때맞춰 나와 준 것에 감사했다. 그가 연애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수시로 들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중요한 맥락을 툭툭 흘리곤 했다. 손이 두툼한 웹디자이너라거나, 동물애호가인데 소고기 킬러라 동물 단체 기부나 캠페인에 열중하는 여자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한동안 마우스를 보다가 조우의 여자를 상상했다. 어느 정도로 손이 두툼한지. 고기를 굽다가는 그의 다른 여자를 상상한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고기를 먹을지도 상상했다.

“알았어. 좌회전. 짜아식. 그런데 너 그 후드가 아직도 있어?

“응 좋으니까, 애정 해.”

후드는 벌써 십 년이 되었다. 조우를 처음 만났던 봄날을 기억한다. 신입생을 환영하는 모든 거하고 촐랑 맞은 행사들이 끝날 즈음 조우는 전역을 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속에서 교내의 벚꽃들이 팝콘처럼 꽃망울을 톡톡 터뜨리던 4월이었다. 어쩌다 나는 총학생회 일을 하게 되었는데 조우는 군대 가기 전부터 학생회 일을 했다고 했다. 내가 대자보를 쓰거나 현수막을 길게 펼쳐놓고 페인트 통을 질질 끌고 커다란 붓을 들고 낑낑대고 있을 때도 조우는 베짱이처럼 낡아빠진 소파에 앉아 기타를 튕기곤 했다. 그는 그래도, 그때도, 필요할 때 참, 참으로 잘 나타나는 사람이었다. 벚꽃이 빗줄기에 처연히 떨어지던 상대의 처마 밑에서 우산을 들이민 것도 그였다. 선전국장이 동대문에서 축제에 쓸 스텝의 옷을 골라 오라 했을 때 같이 가줄까 하고 동행해 준 것도 그였다. 그는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만드는 가게의 위치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소란스럽게 안내자를 자청하지는 않았다. 길을 이끌 뿐 마치 주변인처럼 주도권을 나에게 쥐여주었다. 단체복의 디자인을 고르고, 로고를 박을 위치를 정하고 나서 이렇게 하면 어때라고 물었을 때그는’ 좋네’ 하며 한번 쳐다보았을 뿐이다. 회색 후드는 그때 샘플로 들고 온 것이다. 그래서 그 후드에만 학교의 로고도 축제를 표하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그래도 조우는 그것을 기억한다.

“불판에 양동이 얹어서 백숙 만들어 먹던 것 기억나?”

“여섯 마리. 영계 여섯 마리가 한 양동이.”

조우가 동요를 부르듯 리듬을 타며 말한다.

“인삼도 넣었어. 대추도. 밤도 넣고 싶었는데 너무 비쌌지.”

“네가 닭의 뱃속을 보고 싶지 않다고 쌀도 못 넣게 했어. 나중에 양동이 바닥에 밥알 눌어붙어서 본의 아니게 누룽지 백숙이 되었지. “

“그래서 난 양동이를 보면 그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닭의 누린내가 섞인 누룽지 냄새. 닭을 보면 막 철물점에서 사온 말간 하고 쇠 냄새가 나는 양동이가 생각나고.”

역삼사거리에서 두 번의 좌회전을 했을 뿐인데 우리는 9개의 시와 군을 지나 팔당 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창문을 내리고 손을 오므려 바람을 잡으려 시도한다. 바람이 따뜻했더라면 아마도 젖가슴을 만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손바닥에 실크 같은, 그리고 우유결 같은, 잡히지 않는 젖가슴이 쥐어졌다 빠져가기를 반복한다. 일을 해야 했던 엄마는 젖을 떼기 위해 빨간약을 가슴에 발랐다. 그리고 내게 가슴이 아파서 더 이상 젖을 먹을 수 없다 말했다. 고작 한 살짜리가 아픈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턱은 없겠지만 용케 며칠 만에 엄마 젖가슴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한다. 나는 본능적으로 젖가슴에 집착하고 조우는 젖가슴을 만지는 것보다 자신의 유두가 빨리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가슴팍에 파묻혀 유년기의 아이처럼 그의 유두를 찾을 때면 그는 ‘우리는 파장도 몸도 잘 맞다’라고 읊조렸다. 나는 그 외의 다른 남자의 가슴팍에 얼굴이 묻혀 잠들 때면 잠결에 그것을 찾다 화들짝 놀라 잠이 깨곤 한다. 친하지 않은 사이일수록 나는 더 놀라서 깨어 있으면서도 바로 깊이 잠든 척을 했다. 팔당대교를 지나니 시간은 벌써 1시.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겸 카페인 봉주르가 생각난 것은 그때다.

“백숙 먹자. 봉주르.”

“그으래. 따끈한 것.”

닭백숙이 요리되는 동안 우리는 청하를 한 병 시킨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마신 청하의 숫자를 헤아린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작고 푸른 그 병은 빠른 속도로 비워낼 수 있다. 다른 선배들이 소주보다 비싼 녀석을 잘도 먹는다고 타박을 할 때 그것을 같이 마셔주며 나의 취향을 지켜 준 것도 그였다. 대학 최초의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 학교 앞 어묵집에서 꼬치어묵과 청하를 같이 비워준 것도 그였다. 나는 인사불성이 된 나를 업고 그의 자취방에 재운 것도 그였다.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 결혼해……”

“나 남자를 만났어.”

“신혼집은 그냥 우리 집에 차려.”

“그래서 그날 연락 못 했어..”

“매일 만나도 지겹지 않았어.”

“같이 있으면 편안해.”

“좋은 여자야.”

“좋은 남자야.”

조우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새라는 것은 안다. 지고 싶지 않았다. 늘 나를 챙기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였는데 늘 지는 것은 나였다. 조우가 닭백숙의 닭을 해체한다. 닭 다리 두 개는 그의 몫이다. 입안에서 쫀득이는 닭 날개도 그의 몫이다. 팍팍한 가슴살을 좋아하는 내 앞접시에는 다리와 날개를 제거하고 뼈까지 발라낸 몸통의 살들로만 채워질 것이다. 그를 만난 첫해 양동이에 함께 채워 넣던 영계의 몸통을 들여다보기 싫어한 나를 위해 뼈까지 발라낸다 그러고는 언제나 그는 뜨겁고 커다란 도가니 속에서 딱 내가 한 번에 먹을 만큼만 살을 발라 접시에 내어 주었다. 본인은 닭 다리를 들고 뜯으면서 내 접시의 팍팍한 가슴살이 입안으로 사라지면 또 그만큼의 살을 발라 내 앞접시로 내어주었다. 딱 내가 한 번에 먹기 좋을 만큼만.

“닭 다리 먹을거야.”

“그으래.”

닭다리 따위를 좋아 할리가 없는 나에게 조우는 또 왜냐는 질문 하나 없이 닭다리 살을 한점 발라 건넨다. 남의조언 따위는 듣고 나서도 묵살하는 나에게 유일하게 행동을 꾀하는 조언들을 하는 것은 조우가 유일하다. 남자들이 나를 마음대로 휘두를 때면 그는 데이트를 가는 나에게 오늘은 ‘아니.’를 3번 말하라고 했다. ‘ 밥 먹을래?’ , ’아니.’, ’커피는?’ ,’ 아니’, 걸을까?’, ’아니.’, ’그럼 뭘 원하는 건데?’ 상대는 나에게 4번째 질문에 고함을 치듯 말했다. 겨우 세 번 참는 남자. 나는 그 남자를 수 번도, 수십 번도 참아 주었는데. 그 남자가 참지 못한 것보다 이전처럼 그가 하자는 대로‘그래’라고 대답하지 않자 내가 실제로는 처음부터 그와 하고자 한 것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상대는 그렇게 화를 내고 가서도 며칠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왔다. 나는 그러면 종전의 기억은 없었던 양 지워버리고 그를 받아들 이 곤 했다. 그 남자가 조우와 만난 적은 없지만 조우의 명령대로 내가 5번쯤 더 로봇처럼 행동했을 때 나는 그 남자를 확실히 끊어 낼 수 있었다. 조우는, 조우는 내게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 불평할 수 없는 나는 벌이라도 주듯 그의 닭다리 살을 안주 삼아 청하를 비워냈다. 작고 푸른 그것을 네 병 더 비워냈을 때 조우는 대리기사를 불렀다.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고 있다. 조우를 보내는 어떤 의식 같은 것이라 여기며 짐짓 비장한 각오의 입성이다.무인텔은 여러모로 편리하다. 우리가 방으로 입성하기 전까지 누구도 만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오늘은 조금 다르다. 대리기사가 그의 차를 무인텔의 차고에 주차했으니까. 호텔 카운터 대신 오늘은 대리기사를 의식해야 한다. 조우가 대리 기사에게 키를 건네받고 비용을 계산하는 동안 나는 차고 안쪽의 계단을 반쯤 올라 쪼그리고 앉았다. 차고의 높이가 꽤 높아서 계단 역시 그 개수가 많았다.

“키임아~”

“업고 올라가.”

“그으래.”

나도 그도 십여 년만큼 나이를 먹고, 살이 쪄서 쉬운 요구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조우가 싫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십여 년 전 남자친구와 헤어졌던 날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의 그의 자취방에 나는 그렇게 업혀서 갔을 것이다.

“무거워졌어.”

“응. 세월만큼.”

“아니 닭백숙만큼.”

“아니. 그동안 우리가 마신 청하만큼.”

서두르는 법이 없는 우리는 각각 서로 오랜 시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우리의 목적은 몸을 햛고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다르는 절정의 것이 아니므로 서로의 알몸을 얽기섥기 끌어안고 그대로 꽤 시간을 보낸다. 그의 두툼하고 커다란 품속에서 나는 또 그의 유두를 찾아내어 어릴 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써 놀리다가 종국에는 입을 가져다 댄다. 조우의 그녀도 알고 있을까? 조우가 이런 행위를 좋아한다는 것을. 묻고 싶었지만 알아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의 품에서 조용히 입만 놀린다.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자 나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크고 묵직한 그의 몸은 나의 몸 위에서 숨 막힐 듯 압박하기를 거듭하다 무게 중심을 잃은 밀가루 포대처럼 와르르 내 몸으로 기울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내 내 몸 위에서 그는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린다. 가까스로 깔려있던 몸을 빼내어 엎드려 누운 그를 관찰한다. 그의 등뼈 중앙에 있는 점. 몇 년 전에는 그의 몸에 있는 온갖 점을 세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얼굴에 있는 미세한 주근깨까지 헤아리면 그는 그것은 점이 아니니까 숫자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하고 나는 동그랗고 검은빛이 도는 것이니 점으로 포함 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것으로만 투닥였다. 그의 몸에서 148개의 점을 헤아리거나 3일 밤을새워 삐죽삐죽 솟아난 숱이 얼마 되지 않는 그의 턱수염을 셋다. 503 개의 수염을 세고 나서 나는 딱 떨어지는 500개가 좋다며 쪽집게를 꺼내 3개의 수염을 악착같이 뽑아내었다. 우리의 얽힌 이야기는 여기서 한 단락이 지어질 것이다. 샤워를 하고 기절하듯 잠든 그가 뒤척 거리자 나는 그를 깨워 돌아가자 말한다.

“아침에 가자.”

“연습해야지.”

“무얼?”

“밤에 헤어지는 연습.”

그는 나의 말뜻을 분명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곤 선선히 가벼운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선다. 새벽의 어스름이 채 오기도 전, 늘 그랬듯 그는 나를 태웠던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나는 그와 숨 막힘에 가까운 깊은 포옹을 한다. 그는 내가 보도를 벗어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대 꺼내 물것이다. 내가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그는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손에 들고 음악을 켜고 창문을 열어둔 채 떠날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가 늘 그랬다는 것을 나는 도로 쪽으로 난 창가에서 바라보았으니까. 그래도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 내방 창문을 올려다보는 법은 없었다.<사랑지상주의_우리가 마신 술 병의 수만큼_레이나(l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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