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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이 옥수수밭으로 가는 이유

  • 레이나(leina)
  • 2016년 3월 25일
  • 13분 분량

당신과 바라보던 그날의 바다

“사랑해. 결혼하자.” 우리는 어젯밤 꽤 많은 와인을 마셨다. 그가 몸을 뒤척이며 혼잣말인 듯 사랑한다 말했을 때 나는 어떤 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전의 나라면 기다려왔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뒤척이는 그의 팔로 파고들어 ‘응, 그러자.’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어젯밤 그가 다정하게 굴다가도 농담처럼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가 박혔다. “네가 나중에 남자에 대한 글을 쓴다면 내 이야기도 쓰겠지.” “……. ” “ 써. 마음껏, 나를 못된 남자로 만들수록 좋겠어.” “응 그럴게."

그리고 다시 내 맞은편에 앉아서 술에 취한 채 웅얼 거리듯 말한다.그리고 점점 소리를 높였다.

“사랑해. 결혼하자. 결혼하자고 오!”

사탕을 내놓으라는 5살짜리 애처럼 패악을 부렸다. 떼를 쓰다가 결국 앉고 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의자 다리 하나는 부러졌다.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한다.

“언제 할까? 내일? 모레?”

그의 패악질에는 능숙하다. 턱시도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그가 GM으로 있는 호텔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만큼. 처음 그의 모습도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일 잘하는 예의 바른 호텔리어.

우기의 세부에서 쏟아지는 비가 긋기만을 기다리다 그를 만났다. 그 역시 SM 쇼핑몰의 스타벅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쏟아지는 비를 혼자 구경하고 있었다. 세부의 우기는 먹구름이 밀려오면서 비를 퍼부었다. 비가 퍼붓기 시작하면 아스팔트 길마저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며 잠겨버렸다. 뒷길로 들어서면 그 마을의 사람들은 몽땅 비에 젖어 허리까지 차온 물웅덩이를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몇 번의 폭우를 경험을 하고 나니 숙소로 이 비를 뚫고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 여기 살아요?”

“지금은요.”

“나도 지금은 여기 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혼자 살아요?”

“친구가 곧 올 거예요. 그때까지는 혼자.”

“나도 지금은 혼자에요.”

서울에서 같이 살고 있던 친구 아인이 남자친구와 깊이 헤어지고 한국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 역시 떠나기로 결정했다. 혼자 사는 것은 싫었으니까. 아인이 세부로 가서 어학연수를 하겠다고 먼저 말했지만 먼저 일을 정리하고 세부로 온 것은 내가 먼저다. 그는 가족과 함께였다.얼마 전까지는. 프랑스인 와이프 그리고 어린 딸 하나. 2004년 태국의 쓰나미를 겪고 일에만 매달린 가족은 그를 떠났다. 쇼핑몰이나 수영장 말고는 갈 곳이 없던 동남아의 환경은 휴가지로 찾는 것과 달리 외국인이 살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이다. 아침 일찍 일하러나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일에만 매달리는 남편, 아이는 태어나 종일 울어댔고 메이드나 베이비시터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GM이 되어 필리핀으로 오는 동시에 가족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전 부인이 되어 프랑스로 돌아갔고 아이만 일 년에 서너 차례 그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방관했어요.”

“무슨 이야기에요?”

“쓰나미가 몰려 올 때 나는 보스와 함께 있었는데 파도에 쓸려가는 보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잡으러 갈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달려갔다면 나조차도 이 자리에 없었을지 모르죠.” “그건 당신 탓이 아니잖아요.”

“보스의 막내아들이 내 다리에 매달려서 3일을 함께 했어요. 원숭이처럼 내 다리에 붙어 울어댔고 모든 것은 엉망이었어요.수천 명의 사람이 죽었고 난 여기 3일 동안 내 안위마저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할 만큼. 엄마가 나중에서야 나를 만나서 온몸을 더듬으며 괜찮은지 살펴보았어요. 내가 일하는 호텔의 투숙객도 많이 죽었거든요. 나는 보스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해요. 나중에 보스의 부인은 아들을 살려줘서 고맙다 했지만 나는 그가 죽어갈 때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못 했죠. 나는 그녀의 남편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이에요. 나는 그의 마지막 눈빛, 그것의 뜻을 너무나 묻고 싶어요.”

당신 탓이 아니라는 위안 말고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는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월요일에 보홀에 같이 갈래요? 다이빙 갈 건데 파트너가 돼줘요. 한 명은 예약은 안 된데요. 비용은 내가 낼게요."

나는 더 이상 주지 않은 위안 대신 그가 내민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홀로 건너가기 위해 작은 보트에 올라탔다. 일본인 커플이 두 명, 그리고 네덜란드 커플이 두 명. 세부는 바다가 회색빛이고 시내와는 더더욱 멀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던 중이어서 에메랄드빛의 보홀의 바다를 가보고도 싶었다. 보트를 타고 바다로얼마간 나갔을때, 그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사위가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풍랑이 일었다. 갑자기 이는 풍랑은 배가 뒤집히는 것도 가능할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보트는 모터가 꺼졌고 우리 둘은 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치 놀이공원의 디스코 팡팡에서처럼 난간을 부여잡고 서로의 몸을 엮었다. 아무리 가까운 세부와 보홀의 가운데 바다지만 이대로면 우리는 이 파도 속에서 끊임없이 표류하게 될 것 같았다. 입을 앙다물고 난간을 잡은 채 여자인 나를 챙기려 노력하던 그는 세찬 파도가 계속되자 얼이 빠져 버렸다. 얼이 빠졌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눈빛의 초점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난간을 쥔팔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자꾸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태평양을 건너는 호화 유람선도 겨우 한 시간 거리의 섬에 가는데 구경도 못하고 죽게 생겼다. 나를 이 여행에 포함 시킨 사람은 배가 뒤집히기 전에 어느 곳 하나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마이크! 마이크 정신 차려봐요.”

그가 다시 보트의 바닥에 주저 않았다. 파도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그를 가까스로 끌어와 그의 양팔로 내 다리를 감싸라고 했다. 커다란 덩치의 그는 그대로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다리를 끌어안았다. 표류할 것 같았던 풍랑 속의 우리 배는 우리가 출발한 항구에서 온 커다란 배에 끌려 세부항으로 돌아갔다. 도착시간이 훨씬 지나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홀 쪽의 연락을 받고 우리를 찾아왔다고 했다. 마이크는 육지에 발을 딛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로기 상태였다. 결국 다이빙에 도전한다는 그의 계획도 보홀의 작고 귀여운 원숭이를 안으려던 나의 계획은 보홀섬에 한 발짝도 딛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그날부터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몸살에 걸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몸을 물에 젖은 솜 이불처럼 만들어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열이 잠시 내려가는 틈을 타 일층의 편의점에 기다시피 내려가 이온음료와 우유만을 사서 간신히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삼일째가 되는 날 나는 내 상태가 단순히 감기나 몸살 따위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필리핀의 전화 리스트에는 겨우 집주인이나 메이드 내가 다닐 어학원의 전화번호만이 있을 때다.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 몹시 아픈데 단순히 감기몸살이 아닌 것 같아.”

“병원에 가자.”

뎅기열. 외지인의 환영 방식치고는 과한 그 병의 이름은 뎅기열이었다. 뎅기 모기에 물리면 고열에 시달리는 풍토병의 일환. 예방 약도 치료약도 없어 사람을 꼼짝없이 열에 가두는 병. 고열이 지속되지 않을 때까지 해열제와 체력만으로 견뎌내야 하는 병. 병원의 여자 의사는 피검사 결과지를 들고 흔한 일이라는 듯 병명을 말했다.

“뎅기열이야. 그런데 좀 심각해.”

온몸에 열꽃이 피고 모세혈관이 터진 탓에 나는 심한 욕지기와 가려움에 시달렸다. 그리고 빤히 그 여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 아래야. 너, 수혈 받아야 해.”

식탁을 옮기다 살짝 긁힌 무릎이 그렇지 않아도 물이 찬 것처럼 주먹 하나만큼 부풀어 올랐다. 긁힌 자국 하나도 참아내지못할 만큼 나는 위험한 상태라는 것이다. 해열제 외에는 어떤 약도 줄 수 없다 했다.

“병원에 있는 피를 수혈해 줄 수도 있어. 검사가 모두 끝난 피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증자를 구해와. 되도록 빨리”

나는 낯모르는 필리핀 피를 내 몸 안에 흘려 넣는다는 것이 저어되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열이 나지 않고 토하지 않는 컨디션이 되고 싶었다. 그때 보호 자격이 되어 버린 그가 의사에게 물었다.

“그녀의 피가 어떤 타입이죠?”

“A형이에요.”

“내가 기억하는 한 내 피가 O형이에요. 가능한가요?”

그리고 서너 시간 후 의사는 그의 이름과 블러드 타입 0+쓰라고 쓰인 우묵의 빛깔을 띤 노르스름한 혈장 5백 밀리리터를 내 몸에 연결했다. 이틀 수 퇴원을 할 때까지 필리핀 간병인을 붙여주고 아침저녁으로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오는 나를 위해 알록달록 맛이 다른 게토레이 같은 이온 음료와 종류별의 과일을 들고서. 퇴원을 코앞에 두고서야 그가 40분이나 떨어진 곳에서 사온 한국 식당의 소고기 죽을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일주일 사이 몸무게는 10KG 가까이 빠졌고 나는 그의 집으로 요양이 아닌 요양을 가게 되었다.

책임의 비중을 따지자면 그의 탓이 아니다. 다만 뎅기열을 보홀에서의 일 때문에 몸살로 착각하고 멍청 맞게 끙끙 오래 앓게 되었다는 정도. 그가 5백 밀리리터의 피를 나눠줬으므로 그의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겼지만 그는 내가 병원 신세를 진 것이 꼭 보홀의 책임이 전 부인 것처럼 헌신적이었다.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진 나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든 상태였음으로 그에게 말대꾸를 하거나 싸워낼 힘이 없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나의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내 몸속 피의 일부분, 5백 밀리리터의 지분이 있다며 나를 가로막았다. 세수를 하러 가면 그는 치약이 짜인 칫솔을 내밀었고 배가 고프다고 하면 냉장고를 뒤져 한밤중에라도 샐러드를 만들어 침대로 가져왔다. 다 먹은 접시를 주방에 가져다 놓으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그것을 들고나가 물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점점 그의 아기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렁뚱땅 그와 동거가 시작이 되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더 달라진 것이라고는 샤워 후에큰 타월을 들고 서있다가 나의 온몸의 구석구석을 닦아 준다거나 쇼핑몰로 영화를 보고 외식을 한다는 정도였다. 아침에 그가 출근을 할 때면 나는 넥타이를 골라주고 아침을 차려주고 그는 일과 중 가끔 전화를 걸어와 일에 대한 불평을 하거나 몇 시쯤 퇴근을 한다는 것을 알려왔다. 무엇보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그는 아픈 몸의 나를 위안하고 나는 그의 아픈 마음을 위안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한 번도 보홀 가는 보트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것이 어떤 이유로 벌어진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내 몸이 누군가의 케어를 필요로 한다면 그는, 그의 마음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필요충분조건 때문에 함께일 것이다. 그래도 별다른 싸움도 없이 우리는 그 시간 동안 참으로 편안했고 안락했다

점심때부터 와인을 마신 우리는 어제 마신 술의 취기가 가시기도 전에 빈속에 술을 먹기 시작해서 허기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열쇠를 겨우 찾고 신발의 짝을 맞춰 신으려다 호기롭게 맨발로 나서기로 합의한다.

“뭐 먹을까?”

“스시! 스시!”

나도 충분히 취했으므로 야구장에라도 있는 듯 스시를 연호했다. 우리는 겨우 문을 걸어 잠그고 맨발로 스시집에 간다. 그의 집이 있는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타운하우스의 메인 출입구를 벗어나면 바로 길 건너에 스시집이 있다. 타운하우스의 볕을 받아 뜨거운 보도블록을 우리는 팔딱팔딱 걸어간다. 지금 나는 취했고 그밖에 보이지 않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내 발을 보는지 우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거리의 먼지로 검게 변한 내 발을 뻗어 그의 맨발 등에 대고 문지른다. 그는 양다리에 힘을 주어 내 발목을 잡아채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집은 우리의 단골집이었다. 그와 헤어지지않았을 때도 우리는 종종 이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둘만의 시간이 지루해지면 우리는 새우 스시 위에 녹두 콩만큼 고추냉이를 더 올리고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가 가위바위보에서 지고 고추냉이가 올려진 새우를 먹고 나면 그는 심하게 콜록거리며 차가운 오차를 찾았다. 나는 그 앞에서 깔깔거렸다. “봐, 매운 것은 안된다니까.” “내가 아시아에서 산 게 몇 년인데. 사레 걸렸을 뿐이야.”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그다음의 게임에는 녹두 콩 두 개만큼의 고추냉이를 올렸다. 그는 짐짓 괜찮은 척하면서도 불안해했다. 레아 앞에서 나는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겨우 5살짜리는 다정하기보다 어른스럽다. 그 어른스러움은 내가 만나본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고 나는 한 번도 남자친구의 아이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붙잡고 어른스럽게 보이려 애썼다. 아이 앞에서는 모든 것이 시험대였다. 아이는 처음부터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프랑스의 피가 반이 섞인 아이는 나를 처음 보고 양볼에 입을 맞추는 대신 멀찍이 서서 안녕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마이크의 부모님이 그녀를 데리고 세부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나는 그들이 있는 동안이라도 내 숙소에 가 있겠다 했다.

“ 아니 안돼.”

“왜?”

“우리가 같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어떤 사실도 감출 이유는 없으니까.”

“그래도 레아가 싫어할지도 몰라. 아직 어려.”

“ 아이도 알고 받아들여야지. 아이 엄마도 남자친구랑 살고 있는데 뭘.”

“그래도…”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이 너를 보고 싶어 하셔. 말은 안 통하겠지만.”

아이는 내가 그의 부모님과 와인을 마실 때면 내내 프랑스에 있는 그녀의 엄마와 스카이프를 했다. 그러다 아이가 배가 고플까 봐 내가 말을 걸면 오일 파스타가 먹고 싶다 했다. 내가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파스타를 삶고 아이를 위해 아스파라거스의 껍질을 벗기고 파스타를 만들어내면 아이는 아빠가 만든 것을 먹겠노라 했다. 마이크는 그런 레아와 대항했다. 나는 그들의 교육방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래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오일 파스타를 먹지 않겠다는 레아를 설득하다 포기할 때쯤 레아는 끝내 협상에 응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삶아 불지 말라고 오일에 버무려둔 간도 되지 않은 것을 먹겠노라 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혼자 잠이 들고나서 이내 깨어나 자신을 재워주던 그의 부재에 대해 울부짖었다. 나는 점점 불편해졌다.

우리는 바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스시가 나오자 허겁지것 먹어 치웠다. 그리고 웨이터가 계산서를들고 오자 으레 그랬던 것처럼 그가 계산을 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가 계산을 하도록 버려둔 적이 없다. 내가 고열에서 해방되어 조금 운신을 하게 되어 이 스시집에 왔을 때 신세를 지고 있다 생각한 나는 내가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밥값을 내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그 이후로 혼자 장을 볼 때 빼고 모든 데이트 비용과 외식비용은 그의 차지였다. 그 후 두어 번 더 예의를 갖춰 내가 계산할 것이라 우겼지만 그는 자기를 곤란에 빠뜨리지 말라 했다. 우리는 다시 맨발로 스시집 문을 나선다. 총을 둘러맨 스시집의 경호원은 좌우를 둘러 차를 막아 우리가 길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는 손을 잡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밖에 나서면 그는 언제나 신사적으로 나를 차도에서 먼 쪽으로 걷게 한다거나 붐비는 쇼핑몰에서 두 팔로 원을 만들어 그 안에나를 감싸고 사람들을 비켜갔다. 길거리의 개라도 만진 날이면 그는 항균성분이 함유된 물티슈로 나의 두 손을 꼼꼼하게 닦았다. 보도 블록은 여전히 따끔하리만치 뜨겁다. 이번에는 내가 손을 잡는다. “뛰자.”발바닥이 뜨거워 타운하우스 안의 집 두채를 채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손을 잡고 뛴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전속력으로 달린 사람들 마냥 숨을 고르며 그의 집의 문을 연다. 나는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다.두달전과 지금이 무엇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들에 대한 답을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요즘 어떠셔?”

“잘 지내셔. 지난주에도 나에게 뮌헨 집의 장미 사진을 보내오셨어.”

“어머니가 가꾸시는 가든?”

“응. 너에게 보여주라고.”

“보여줘!”

“그래서 내가 너랑 헤어졌다 그랬어.”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짐짓 도도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다정했고 두 달만에 만난다는 것을 제외한 어느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오랜만에 만나서 와인을 먹고 섹스하는 친구와 같은 어떤 다른 관계를 나에게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마이크가 스카이프를 켠다. 독일의 부모님일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얼마 전 은퇴하고 두 분이 소소하게 지내신다. 두 분은 마케도니아 출신이다. 그래서 마이크는 독일에서 태어났어도 늘 자신은 마케도니아 사람이라고 했다. 그곳은 전사의 도시다. 지금은 퇴락한 어느 유럽의 나라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나라 중 하나지만. 마이크가 그곳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핏줄에 대한 역사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성주의 아들이었다. 하녀였던 엄마와 사랑에 빠지고 독일로 도망쳤다. 마이크가 태어나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성에 방문했을 때 이제 그만 내려놓을 법도했지만 그를 보자마자 어떠한 인사도 없이 말했다. “네 피에는 저급한 피가 흐른다.” 그러든가 말든가 70을 앞둔 나이에도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지언정 어머니가 침실에 가지 않고 깨어있다면 같은 공간에 있기를 고집한다. 어머니가 일어나면 함께 일어나고 외출도 꼭 두 분이서 손을 잡고 걸었다. 처음으로 자식을 보여준 아버지는 그 앞에 내밀어진 유산을 포기한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고 곧장 독일로 돌아왔다. 스카이프로 인사를 하던 그가 화면을 돌려 나를 비춘다.

“마미, 구텐 모르겐.”

그다음부터는 그가 통역을 하고 나의 말도 옮긴다. 어머니는 가든의 빨간 장미정원을 비춘다. 내게 보여주고 싶노라며. 덩치가 크고 당뇨까지 있으신 아버지는 느린 걸음을 옮겨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어머니의 귀에 꽂아 준다. 어머니가 아이처럼 웃는다. 전화를 끊기 전 엄마는 다음에는 직접 그것을 보러 오라 말한다.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그가 대답한다.

"그럴게요." “레아는?”

“많이 컸어. 자기는 아이폰을 가질 만큼 충분히 자랐으니 새로운 모델의 아이폰을 사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뭘 그래서야 나는 그 문장을 듣자마다 깔깔거리는 것을 참느라 힘들었지.”

레아를 자주 볼 수 없는 그는 아이에게 단호하게 굴다가도 애틋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볍게 아이 엄마와 재결합할 생각은 하지 않느냐 물었다.

“어려웠을 때 떠난 사람은 다시 어려워지면 떠나.”

그들이 돌아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날, 레아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엄마와 스카이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통화하는 것은 프랑스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마이크가 소리를 질렀다.

“레아,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인터넷을 꺼버리겠어.”

그래도 레아는 끊임없이 프랑스어로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이 나누는 내용을 알 수 없었으므로 상관치 않고 그의 부모님과 내가 사온 샴페인을 뜯었다. 갑자기 아이가 아이패드를 들고 다가왔다. 화면에는 아이의 엄마,마이크의 전 부인이 떠있었다. 일순간 그녀와 다정하게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아니라고 아이패드를 밀어내어야 할지 혼란스러운데 인터넷이 꺼졌다. 아이가 소리쳤다.

“아빠는 킴만 생각해.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킴만 케어해!”

이번에는 영어였다.

“레아 너 잘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어. 이제 그만 침실로 가.”

“아빠 말은 듣지 않겠어.”

레아는 마이크의 통제 밖이었다. 마이크 역시 화를 억누르고 있지만 씩씩거릴 정도로 흥분 상태다. 아무리 양육비를 보내고만날 때마다 정성을 쏟는다고 해도 부녀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 년에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어떤 것도 상관없이 딱 12분의 일, 아빠와 함께 보내는 일 년 중 한 달만큼 지분이 있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피의 겨우 500밀리미터가 마이크의 지분이라면 아이의 몸 절반은 마이크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비켜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레아를 재우고 나온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너를 다음 주에도 만날 수 있어. 레아와 너희 부모님을 더 오랜 시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내가 여기 없더라도 밥을 먹거나 들려서 볼 수 있을 거야.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상황을 더 나쁘게 하는 것 같아. 나와 레아 사이도.”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레아는 소리를 질러가며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택시는 곧 출발하였고 나는 그의 부모님과 레아를 떠나기 전까지 만나지 않았다. 그들과 같이 유럽으로 간 마이크가 공항으로가던 날 전화를 통해 그들과 인사했다. 마이크는 그렇게 한 달, 유럽에 있는 동안 다시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두고 이해하려 애썼다. 상황이 충분히 복잡해 보였으니까. 나는 그가 돌오기 전까지 명확한 답을 내지 않더라도 적어도 시간을 보내고 조금 더 괜찮은 상황이 되기를 소원했다.

“왜 그런 거야?”

“그때는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만나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둔 적도 잠자리를 한 적도 없었어.”

“나는 한 번도 너와 헤어지지 않았어.”

그는 다시 모드를 전환해서 짓궂게 대답했다. 우리는 이 사안을 놓고 수 번을 싸웠다. 그가 유럽에서 돌아왔다고 소식을 전하고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파티에 드나들면서도 도통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기다리던 나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나는 그가 유럽에 있는 동안 왜 메시지 하나도 해오지 못했는지 아직 따져 묻지도 못 했다. 그의 처신은 내게 부당했다. 그리고 새로운 클럽의 오프닝 파티에서 친구들과 있는 내 손목을 잡아끌고 따져 물었다. ‘우리 사이가 끝난 것은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이며 나는 적어도 그가 아는 세 명의 지인의 친구들과 잔, 아주 헤픈 여자다’라고.

“이름이 뭐야 그 남자들.”

“나도 몰라.”

“말해. 다 죽여 버리게.”

나는 그런 일이 없음으로 속이 뒤집혔다. 그리고 좁은 세부의 사교계에서 우리는 그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우리는 연속해서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그린벨트의 하바나 바에서 만났을 때는 모든 상황을 아는 아인이 나대신 그의 뺨을 올렸다. 화를 내기에는 약하게, 화를 내면 쪼잔하게 여겨질만한 중간 강도로. 나는 그날 아인에게 역시 너는 내 베스트라며 밤새 술을 샀다.

그리고 얼마 후, 그가 모든 것이 자기 친구의 오해였다며 저녁 먹기를 청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만났고 또 취했다. 지금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1박 2일 동안 와인에 분위기에 취해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레아는 고작 일 년에 두세 번 보는 사이이고 아이도 나이를 먹으면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내 말이 아닌 친구의 말을 믿고 나를 끊어내고 곡해한 것이 분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앙탈 맞을 만큼 거칠게 빌라의 오픈 거실에서 나를 밀어붙인다 오랜만의 들뜸 같은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것에 따라가는 척 보이려 애썼다. 아직 분명하지 않은 개운하지 못한 머릿속은 자꾸 행위에 집중하는 것보다 이것이 나를 향한 들뜸인지 단순히 오랜만의 섹스 때문인지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린다. 그는 침대에서 특별한 것이 없던 사람이다. 오히려 심심할 정도였다. 키스를 하고 가슴에 잠시 머무르다 삽입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격정보다는 안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내 원피스를 올려 팔 위로 벗기려다 그것을 손목쯤에 두어 내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묶어두었다. 나는 다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가 전과 다른 섹스를 하는 이유가 격정인지 아니면 그사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어떤 것을 배운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머릿속에서 어떠한 생각이 원을 그리는 것과 상관없이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돌려세우고 뒤에서 공격해왔다. 나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건 무언가 맞지 않는다.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느라 행위를 즐길 수가 없다. 조금 더 내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된 뒤라면 나도 그의 들뜸에 동참했을 것이다. 어느 때와도 판이하게 다르게 그는 야생의 동물처럼 날뛰었고 나는 그것에 맞추려 노력한다. 거실에서 시작된 행위는 침실로 들어가서도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는 잠이 들었다. 나는 깨어있다. 이제 나는 그와 이전에 가졌던 어떠한 안락감이나 애틋함이 없다. 그와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는 나와 아이를 셋을 가지고 싶다 말했다. 아이들은 그가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 전 세계를 유랑하며 커나갈 것이다.100% 한국인임이 평생 불만이었던 나와 다르게 그들은 마케도니아의 피가 흐르는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밑에서 아시아의 어느 도시나 휴양지, 유럽의 어느 도시를 몇 년씩 방랑하며 클 것이다. 레아는 힘들지만 그의 부모님은 좋다. 내가 한국의 어른들에게 하듯 시간이 되면 약봉지와 물을 챙긴다거나 크리넥스가 필요할 때면 코앞에서 내미는나를 무척이나 사랑스러워했다. 엄마는 자신의 어릴 때와 내가 무척이나 닮았다며 내 염색된 밝은 갈색의 머리칼도 햇볕에 그을린 피부도 틈만 나면 쓰다듬고 손을 잡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와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 분명히 내가 이유를 댈 수있는 것이라고는 왜 그가 유럽에 있던 동안 단 한차례도 연락을 해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잠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그가 부스스 눈을 뜬다. 그리고 또르르 굴러 와 내 품에 얼굴을 파묻는다.

“배고파.”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우리는 이틀 내내 먹고 마시기만 하네.”

“섹스도 했잖아.”

“그건 그래.”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자 그는 처음 그때처럼 타월을 펴들고 포옹해왔다 그리고 내 몸 구석구석 물기를 닦아 주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나갈 준비를 끝낸 우리는 처음 우리가 만났던 SM 쇼핑몰로 향한다. 바나나 리프 레스토랑에서 테이블 매트 사각으로 잘라진 시들지 않은 바나나 잎이 깔려있다. 주문한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

“나 다음 주에 한국가. 그전에 보자”

“얼마나 있다 올 건데.”

“3주? 길면 한 달 정도.”

“금방 오네.”

어쩌면 그와 내 시계의 흐름은 다를 수도 있다. 어떠한 사람은 시시때때로 통화를 하고 문자를 하지만 어떤 이들은 각각의 생활을 하다가 한 달에 두어 번 데이트를 하기도 하니까. 내가 만나자마자부터 그와 지냈기 때문에 어쩌면 그의 평상시 시계의 흐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 달 동안 그가 연락이 없던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니면 애써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제 너를 시험했어.”

“응?”

“벤 이 너에게키스하려고 했지?”

나는 만취 상태였지만 그것을 기억한다. 그것을 따져 묻지 않았던 것은 호텔 오너이자 세부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람둥이 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와이프와 친구인 여자에게도 스스럼없이 같이 밤을 보내자며 호텔을 고르라고 천연덕스러운 문자를 보내는 인물이다.

“잊고 있었네. 응 그랬어. 미친놈 같아.”

“벤 이 그랬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고. 다시는 나한테 그런 것 시키지 말래.”

그는 시원하다는 듯 재밌다는 듯 껄껄거렸다.

믿었다는 것. 친구가 오해였다는 것을 밝히고 나서야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는 것. 그가 어젯밤 사랑한다거나 결혼을 한다는것에 대한 질문 역시 무게는 없고 꾸준히 나의 순종을, 나의 해바라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 고열에 휩싸여 그의 치하 아래서 어린애같이 지내던 내게는 의심이 없었다는 것.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계산서를 가져오자 언제나 그랬듯 마이크가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나는 카드를 꺼내 얼른 웨이터에게 내밀었다. 그가 웨이터에게 내 카드를 빼앗으려고 들자 나는 눈에 힘을 주어 내 카드로 계산하기를 청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디언들은 성년이 되기 전 옥수수밭에 가. 일종의 시험인 셈이지. 정해진 옥수수밭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로지르며 가장 좋은 옥수수를 하나 골라오라는 과제를 받아. “

“그래서?”

“대부분은 빈손이거나 중간에나 미칠 어중간한 것들을 고랑의 끝에서야 떠들고 머쓱하게 밭의 끝에 서있는데. 꽤 긴 옥수수밭을 지나면서 크고 좋은 옥수수를 발견해도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걸어가는 거지.”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결국 막판이 되어서야 두고 온 옥수수를 기억해. 어떻게 하던지 삶은 최대 행복을 유지하기는 힘들어 늘 저울질하다 끝이 나지. 늘 더 좋고 완벽한 것을 찾다 좋은 것마저 잃곤 하지.”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홍콩으로 발령받아 떠나지 수개월 동안 우리는 좁은 세부에서 또 마주치고 나의 팔목을 잡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사랑지상주의_인디언이 옥수수밭으로 가는 이유_by 레이나(l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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